뉴스/정보는 누군가의 레고가 될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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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Engagement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 여담이지만 GNI Innovation Challenge Round 2 발표를 준비하면서 통역하시는 분들께 engagement를 참여로 번역하는 건 애매하다고 말씀을 드릴 정도였습니다.

토머스 백달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Participation과 Engagement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하라고 말이죠. 그리고 비유를 듭니다, 한 어린 친구가 레고를 가져놀고 있는 사진을 보라고 하면서.

"Let me give you an example. Here you see a kid playing with LEGO (or Duplo in this case). She is engaging with LEGO. In other words, she is enjoying spending time with it, using it, finding an interest in it, etc. This is what it means to engage with something. It's a dedication of time, use, and value.“ 

무언가와 engage한다는 건, 곧 시간과 사용, 가치를 바치는 행위입니다. 좋아요 하나를 누르는 행위 그 이상을 의미한다는 거죠. 온라인 설문에 ‘참여’하는 것 그 이상이라는 얘기입니다.

저는 Engagement를 관여로 번역을 하는 편입니다. 사실 이 말로도 충분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교감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뉴스, 언론에 있어 ‘수용자의 engagement’, ‘수용자와의 engagement’라는 건 독자와의 돈독한 관계가 형성되는 적극적인 상호작용의 포괄적 행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백달의 비유에 제가 주석을 달아보려고 합니다. 사용자는 레고에 몰입하고 레고를 즐기고, 레고에 빠져들며, 레고에 상상력을 불어넣고 또다른 레고를 구매하는 욕망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단순한 접촉과 참여를 넘어서 그것에 고착되는 일련의 경험과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죠. 최종은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로 나타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engagement가 중요할까

이 지점에서 왜 engagement가 중요한가에 대해 질문을 갖게 됩니다. 그것은 니먼랩의 매튜 인그램이 언급한 대로 신뢰와 수익을 위해서입니다. 그가 인용한 몇몇 전문가들의 코멘트를 번역해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도움이 될 겁니다.

마이크 매스닉(Techdirt 창업자) : “많은 언론사가 저지르는 기본적인 실수는 (언론사가) 항상 커뮤니티 구축 비즈니스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조이 메이어(Trusting News Project 대표?) : “저널리즘에 대한 신뢰가 극단적으로 낮을 때, 그리고 많은 독자들이 편향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때, 독자들과 engaging하는 것은 때론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그들을 확신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서머 필드(히어켄의 기술 컨설턴트) : “당신이 수용자들에게 더 많은 가치를 두고 있다는 걸 수용자들이 더 많이 볼수록, 그들은 당신을 신뢰할 뿐 아니라, 재정적이든 시간이든 더 많이 지원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설명에서 확인할 수 있듯, Engagement는 작은 범위의 기술적 장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언론사와 독자가 긍정적이고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온/오프라인의 모든 관계맺기 행위를 뜻합니다. 그저 체류시간과 인당 페이지뷰를 끌어올리는 성과 그것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신뢰를 만들어가는 경로이며, 수익을 향상시키는 방편입니다.

Engagement는 약혼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죠. 맞습니다. 독자들과 약혼을 맺기까지 이뤄져야할 대화, 교감, 동반, 믿음 등등. 결국 마이크 매스닉이 말했던 것처럼, 언론사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제를 풀어가기 위해 Engagement를 높여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뉴스/정보는 어린이들의 레고가 될 순 없을까

셔드슨은 그의 책 ‘뉴스의 발견’에서 저널리즘이 대중과 분리된 계기로서 객관성을 언급했습니다. 뉴스, 저널리즘의 객관성을 보증하는 장치로서 저널리즘은 두 가지 방안을 고안했는데, 한 가지가 고급 수준의 훈련과 교육 프로그램이었다면 다른 한 가지는 대중과의 분리였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면서 현학적 언어가 늘어났고, 전문 용어들로 도배가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널리즘은 대중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독자를 향해야만 하고 독자와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객관의 전통이 드리운 ‘독자와의 분리’라는 관계 단절의 관성은 이 Engagement에 대한 상상을 빈약하게 만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미칠 위험, 휘둘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죠. 저널리스트들은 이를 충분히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음에도 지레짐작으로 외면해왔습니다.

뉴욕타임스의 리더센터 이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독자들이 때론 거의 같은 질문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기사를 쓰거나 설명하도록 하게 만든다”라고 말이죠. 듣고 있다는 시그널을 보여주고, 그것이 기사라는 하나의 결과물로서 발현될 때 독자들의 신뢰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던 듯합니다.

어느 나라보다 신뢰가 낮은 우리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Engagement를 높여나갈 다양한 방편들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저널리즘을 한단계 더 풍성하게 살찌울 것이라는 저는 생각합니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도해야 할 자연스러운 다음 행보가 아닐까 하여 이렇게 장황하게 남겨둡니다. 바로 우리의 뉴스가 우리들의 독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레고가 되기 위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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