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문의 저널리즘 인식과 문화, 정의의 역사

아래 자료는 저널리즘에 대한 국내 신문들의 정의와 인식이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모은 자료들입니다

국내 신문의 저널리즘 인식과 문화, 정의의 역사

아래 자료는 저널리즘에 대한 국내 신문들의 정의와 인식이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모은 자료들입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을 통해 원문을 확인했으며 필요 시 관련 원본 신문본을 캡처해 자료 사진으로 삼았습니다. 저널리즘이라는 외래어를 지칭하는 ‘쩌날리즘’, ‘쩌널리즘’, ‘저널리즘’를 검색 키워드로 활용했음을 밝힙니다.


1920년대

1926년 4월30일 동아일보 : 미국의 민중극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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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만 하더라도 저널리즘은 ‘쩌날리즘’으로 표기가 됐으며, 신문업 그 자체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쩌날리즘”(신문업)이란 것이 혹 새로운 예술형식을 만들러 열는지 아직 말지에 속한 문제로 볼 수밧게 업스니 그 이상 더 서러운 재료에 니르러서는 역도를 불허하는 바이다.   

1940년대

1949년 1월11일 : 현상은 타개될 것인가(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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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월11일자 경향신문에는 문학평론가 백철의 칼럼 한 편이 게재됐다. 도쿄 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1930년대 시인으로 등단해 오랜 기간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도쿄 유학 당시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을 시작했으나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 등을 거쳤다.

백철은 해방 뒤 중간파 문인으로 분류가 됐는데, 이는 좌파 문인들이 월북한 뒤 ‘좌파 문학의 공백’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그렇게 평가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 칼럼에서 ‘저널리즘’이라는 표현을 한 차례 사용한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지금의 ‘매스컴’과 동일한 의미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유학파들에게 저널리즘은 가치 중심적 정의가 아니라 ‘새소식을 알리는 행위와 그 매체’ 정도로 인식됐던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중간파라는 것은 저널리즘에서 편의상 명칭된 것인데 거기 해당되는 작가들이 모르는 동안에 그 명칭에 안도해버린 태도가 벌서 안이한 생각이다. 만일 중간파라는 그 군단 속에 내 자신을 포함해서 생각한다면 나는 첫재 그 중 중간파라는 명칭에 크게 불만을 갖는자로서 나는 그 중 중간파라는 일흠 대신에 이 작가군이 하나의 현실주의적인 경향 우에 통합될 수 있지 않을까 구상한 일이 있다. 그 의미에선 이 작가군을 신현실주의파라고 불너도 좋을 것이다.”  

1950년대

1953년 5월14일 경향신문 : 현대와 그 항변 – 두 개의 오식의 정정(백철)

문학평론가 백철의 칼럼은 저널리즘과 문학의 위상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백철은 국제신문에 기고한 자신의 논문 부제가 일부 수정된 것에 불만을 드러며, 신문의 위상을 한없이 깎아내린다. 그는 1949년 칼럼에서와 같이 신문 매체 일반을 저널리즘이라 칭하면서 “선진한 나라에 비해 미숙하다”고까지 비판했다. 심지어 “쩌낼리즘”이라는 비하적 용어를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문학과 문학 작가가 저널리즘과 기자들에 비해 우위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편집국 내부에 문화부 기자의 중간자적 입지를 추정해볼 수 있는 칼럼에 해당한다.

“요는 일방적인 생각인지는 모르나 “저널리즘”측이 더 문학에 대해서 그 예의를 개선하도록 요청될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땅의 후진한 “쩌낼리즘”은 선진한 나라의 그것과 비하여 그 자체가 미숙한 거 형적인 것이니 그것이 충분히 작품의 시장으로 되지 못할 바엔 차라리 문학측의 동반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후진한 그것의 일 성격으로 될 것을 생각하는데서이다. 구체적으로 중간에 끼인 문화부기자들의 고충도 염두에 두지만 우선 그들의 동반적인 협력을 요청코 싶어 여기에 먼저 일언을 적는 바이다.“  

1955년 5월11일 경향신문 : 쩌널리즘 시비

전후 저널리즘과 저널리스트라는 정의과 개념은 ‘편승‘과 동일한 의미였음을 유추해볼 수 있는 글이다. 지식과 교양이 부족한 생산자 집단들이 풍문과 시류에 맞는 소식을 편집해 내보내는 그런 류의 정보 미디어가 저널리즘이었던 듯 보인다. 오죽했으면 “스스로를 학대하지 않는 동시에,,,”라는 표현을 그들의 지면에 직접 써야만 했을까.

“쩌널리즘에 휩쓸리지 말라는 경고는 예나 이제나 문화적 지조를 지키는 귀중한 신조의 하나가 됨직한 말이다. 이때의 쩌널리즘이란 편승이라든지 통속적인 면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신문잡지의 시사적 제약 또는 시효성이 반드시 편승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며 대중을 통속이라고 속단해버리는 것은 적극적 문화의식이 아니다. 건전한 쩌널리즘을 육성하는 책임은 실상 문화에 종사하는 사람들 자신이 져야 한다. 쩌널리즘의 지도성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상식인 것이다.

쩌널리즘과는 담을 쌌다는 서재파경향도 값진 것이요, 반면 현실적인 지면난에 비추어 더욱 쩌널리즘을 아끼려는 양식도 또한 귀한 줄 안다. 신문 잡지의 제작당사자들이 스스로를 학대하지 않는 동시에 훌륭한 지식과 교양의 힘이 쩌널리즘을 원수처럼 여기지 말고 능동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오늘의 대중에게 좋은 양식을 제공하기를. (K)

1956년 3월25일 경향신문 : 신문 자유의 과부족(곽복산)

image 출처 : http://download.kpf.or.kr/MediaPds/CBEDEVAXFCIVKZL.pdf

1956년 3월19일 도쿄에서 개최된 국제신문편집자회의(IPI) 아시아 컨퍼런스는 한국 신문산업의 현재를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의 신문편집인들은 이 회의에 초청을 받지 못했다. 언론 자유가 억압된 국가라는 평가에서다.

이 글은 국내 1세대 신문학자인 곽복산이 직접 기고했다. 곽복산은 국내 최초 신문학부인 홍익대 신문학과 창과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이후 중앙대 신문학 석사 과정을 개설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국내 대학학부에 신문학과가 개설되기 전 서울신문학원을 운영하며 저널리즘학을 일궈온 그에게 1956년 국제신문편집인협회 아시아 콘퍼런스 초청 불허는 충격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서구와 한국 저널리즘의 태생과 성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에 주목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그의 진단은 조금은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승만 정부의 언론 탄압이 상당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 한국은 구미의 선진민주주의 국가같이 수세기에 걸쳐 쟁취하여 얻어낸 신문의 자유를 불과 이십년 동안에 제자리에 잡게 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물론 신문의 자유는 국가의 기본이념에 따라 그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이 위치하여 있는 국정으로 살펴 보아서 신문의 자유가 전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다고 단정을 내릴 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로스 사무국장이 한국을 공산독재국가와 동일한 범주로 취급함에 있어서는 그 의도하는 바를 이해키 곤란한 바 있다. 

(중략)

이러한 의미에서라도 이번 기회에 우리 신문계는 오랫동안 숙제로 나려오는 신문협회를 빨리 결성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우리 신문계도 자율적으로 신문의 윤리를 향상시킬 수 있으며 신문의 자유를 수호하고 신문인의 권익을 옹호할 수 있는 방도가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필자 서울신문학원장대리)

1959년 1월5일 동아일보 : 쩌널리즘 소고(김이석)

이쯤 되면 저널리즘이 멸시받는 언어였음이 분명해진다. 지식인들이 신문잡지에 기고하는 행위는 수치스러움이며 자신의 지적 결과물을 잡문 수준으로 낮춰 보내는 행태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기자층의 지적/교양 수준을 파악해본다면 당시 지식인층들이 저널리즘을 무시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견식 있는 학자란 분들은 쩌널리즘을 멸시하는 기풍이 있는 모양이다. “그 친구는 요즘 신문 잡지에 되지도 않은 글을 디립다 쓰드구만 그럴 시간이 있다면 좀더 열심히 공부나 할 생각은 하지 않고”하고 친구를 생각이나 해주듯 비방하는 학자들을 우리들은 흔히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난 우리나라 잡지란 통 읽지 않아 간혹 어쩌다가 소설 같은 것을 들여다봐도 재미가 있어야 말이지” 자기의 제자인 문학청년이 문단 이야기를 끄집어내도 이런 투로 퉁겨버리고 만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신문이나 잡지를 전혀 글을 쓰지 않는 바도 아니다. 너무와서 졸라대기에 무엇 하나 써주었지.“ 

1960년대

1964년 2월17일 경향신문 : ‘우리나라 처음 신문석사과정’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금년부터 신문학석사학위과정이 생긴다.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이번 한국 최초로 신문학과 석사학위과정알 두어 약간 명의 신문과대학원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새로 생길 중대대학원 신문과에서는 주로 신문학이론, 매스콤 이론, PR 및 라이도, TV 저널리즘 그리고 사진 및 광고에 관한 전용적인 연구를 시도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62년 4월5일자 경향신문 :‘혁명 후의 신문을 말한다-서비스’(윤상철 기자)

그는 봉사(즉 서비스)를 저널리즘의 역할로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독자의 추상적인 뜻이 곧 정의라고 한다면 신문의 봉사는 정의의 구현으로 독자의 눈을 끄는데 있다.“ 

그는 “독자로 하여금 재미나게 읽히는 것이면, 뭣이나 기사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허스트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슬쩍 비판적인 톤을 내뱉습니다. 오히려 ‘봉사’라는 한자어의 어원을 되새김질하며 하인이면서 동시에 교사라는 가치를 끌어오더군요.

독자들에게 재미만을 선사하는 것이 저널리즘이 아니라 봉사의 관점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것도 저널리즘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듯합니다. 비록 ‘신문왕’ 허스트의 코멘트에 약간 위축된 톤이긴 하지만 말이죠. 62년 박정희 정권 시절의 저널리즘은 대략 이런 수준에서 정의가 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

1964년 9월 9일 동아일보 : ‘윤리위 소집을 고집치말라’(사설)

 “저널리즘을 불가결의 제4부라고 말했던 ‘허버트 브루커’는 한편, 저널리즘이 영리사업이라는 면에서는 하이드씨이고 민주주의사회에 공헌하는 의의라는 면에서는 지킬 박사라고 말했다. 극단적ㅇ로 말하자면 저널리즘은 신적인 면과 악마적인 면을 아울러 갖추고 있는 엠비버런트적인 것이며, 어느 일면만이 강조되고 다른 일면이 무시되어서는 안되는 것은 한국의 저널리즘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1964년 11월2일 경향신문 : 기자 지망생에게(박신일)

“사회를 보고 그것을 기록하여 고발하는 엄격한 직업이란 점에서 엄청난 시련과 갈등을 감당할 태세를 언제나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한번 뛰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영하의 추운 겨울 새벽 6시에 일어나 약수동산 16번지 눈덮인 빈만가 언덕을 기어올라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는 복어알을 먹고 숨진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현실에 묵묵히 대처할 힘이 필요할 것입니다.(이하생략)“(서울대문리대 영문과졸, 경향신문 64년 입사, 외신부 기자) 

아래 자료는 저널리즘에 대한 국내 신문들의 정의와 인식이 어떤 변화를 겪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모은 자료들입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을 통해 원문을 확인했으며 필요 시 관련 원본 신문본을 캡처해 자료 사진으로 삼았습니다. 저널리즘이라는 외래어를 지칭하는 ‘쩌날리즘’, ‘쩌널리즘’, ‘저널리즘’를 검색 키워드로 활용했음을 밝힙니다.


1920년대

1926년 4월30일 동아일보 : 미국의 민중극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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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만 하더라도 저널리즘은 ‘쩌날리즘’으로 표기가 됐으며, 신문업 그 자체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쩌날리즘”(신문업)이란 것이 혹 새로운 예술형식을 만들러 열는지 아직 말지에 속한 문제로 볼 수밧게 업스니 그 이상 더 서러운 재료에 니르러서는 역도를 불허하는 바이다.

1940년대

1949년 1월11일 : 현상은 타개될 것인가(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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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월11일자 경향신문에는 문학평론가 백철의 칼럼 한 편이 게재됐다. 도쿄 사범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1930년대 시인으로 등단해 오랜 기간 문학평론가로 활동했다. 도쿄 유학 당시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을 시작했으나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 등을 거쳤다.

백철은 해방 뒤 중간파 문인으로 분류가 됐는데, 이는 좌파 문인들이 월북한 뒤 ‘좌파 문학의 공백’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그렇게 평가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 칼럼에서 ‘저널리즘’이라는 표현을 한 차례 사용한다.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지금의 ‘매스컴’과 동일한 의미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유학파들에게 저널리즘은 가치 중심적 정의가 아니라 ‘새소식을 알리는 행위와 그 매체’ 정도로 인식됐던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중간파라는 것은 저널리즘에서 편의상 명칭된 것인데 거기 해당되는 작가들이 모르는 동안에 그 명칭에 안도해버린 태도가 벌서 안이한 생각이다. 만일 중간파라는 그 군단 속에 내 자신을 포함해서 생각한다면 나는 첫재 그 중 중간파라는 명칭에 크게 불만을 갖는자로서 나는 그 중 중간파라는 일흠 대신에 이 작가군이 하나의 현실주의적인 경향 우에 통합될 수 있지 않을까 구상한 일이 있다. 그 의미에선 이 작가군을 신현실주의파라고 불너도 좋을 것이다.”

1950년대

1953년 5월14일 경향신문 : 현대와 그 항변 – 두 개의 오식의 정정(백철)

문학평론가 백철의 칼럼은 저널리즘과 문학의 위상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백철은 국제신문에 기고한 자신의 논문 부제가 일부 수정된 것에 불만을 드러며, 신문의 위상을 한없이 깎아내린다. 그는 1949년 칼럼에서와 같이 신문 매체 일반을 저널리즘이라 칭하면서 “선진한 나라에 비해 미숙하다”고까지 비판했다. 심지어 “쩌낼리즘”이라는 비하적 용어를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문학과 문학 작가가 저널리즘과 기자들에 비해 우위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편집국 내부에 문화부 기자의 중간자적 입지를 추정해볼 수 있는 칼럼에 해당한다.

“요는 일방적인 생각인지는 모르나 “저널리즘”측이 더 문학에 대해서 그 예의를 개선하도록 요청될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이 땅의 후진한 “쩌낼리즘”은 선진한 나라의 그것과 비하여 그 자체가 미숙한 거 형적인 것이니 그것이 충분히 작품의 시장으로 되지 못할 바엔 차라리 문학측의 동반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후진한 그것의 일 성격으로 될 것을 생각하는데서이다. 구체적으로 중간에 끼인 문화부기자들의 고충도 염두에 두지만 우선 그들의 동반적인 협력을 요청코 싶어 여기에 먼저 일언을 적는 바이다.“  

1955년 5월11일 경향신문 : 쩌널리즘 시비

전후 저널리즘과 저널리스트라는 정의과 개념은 ‘편승‘과 동일한 의미였음을 유추해볼 수 있는 글이다. 지식과 교양이 부족한 생산자 집단들이 풍문과 시류에 맞는 소식을 편집해 내보내는 그런 류의 정보 미디어가 저널리즘이었던 듯 보인다. 오죽했으면 “스스로를 학대하지 않는 동시에,,,”라는 표현을 그들의 지면에 직접 써야만 했을까.

“쩌널리즘에 휩쓸리지 말라는 경고는 예나 이제나 문화적 지조를 지키는 귀중한 신조의 하나가 됨직한 말이다. 이때의 쩌널리즘이란 편승이라든지 통속적인 면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신문잡지의 시사적 제약 또는 시효성이 반드시 편승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며 대중을 통속이라고 속단해버리는 것은 적극적 문화의식이 아니다. 건전한 쩌널리즘을 육성하는 책임은 실상 문화에 종사하는 사람들 자신이 져야 한다. 쩌널리즘의 지도성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상식인 것이다.

쩌널리즘과는 담을 쌌다는 서재파경향도 값진 것이요, 반면 현실적인 지면난에 비추어 더욱 쩌널리즘을 아끼려는 양식도 또한 귀한 줄 안다. 신문 잡지의 제작당사자들이 스스로를 학대하지 않는 동시에 훌륭한 지식과 교양의 힘이 쩌널리즘을 원수처럼 여기지 말고 능동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오늘의 대중에게 좋은 양식을 제공하기를. (K)

1956년 3월25일 경향신문 : 신문 자유의 과부족(곽복산)

image 출처 : http://download.kpf.or.kr/MediaPds/CBEDEVAXFCIVKZL.pdf

1956년 3월19일 도쿄에서 개최된 국제신문편집자회의(IPI) 아시아 컨퍼런스는 한국 신문산업의 현재를 드러낸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의 신문편집인들은 이 회의에 초청을 받지 못했다. 언론 자유가 억압된 국가라는 평가에서다.

이 글은 국내 1세대 신문학자인 곽복산이 직접 기고했다. 곽복산은 국내 최초 신문학부인 홍익대 신문학과 창과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이후 중앙대 신문학 석사 과정을 개설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국내 대학학부에 신문학과가 개설되기 전 서울신문학원을 운영하며 저널리즘학을 일궈온 그에게 1956년 국제신문편집인협회 아시아 콘퍼런스 초청 불허는 충격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서구와 한국 저널리즘의 태생과 성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에 주목하면서 “언론의 자유를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그의 진단은 조금은 처량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승만 정부의 언론 탄압이 상당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 한국은 구미의 선진민주주의 국가같이 수세기에 걸쳐 쟁취하여 얻어낸 신문의 자유를 불과 이십년 동안에 제자리에 잡게 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물론 신문의 자유는 국가의 기본이념에 따라 그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이 위치하여 있는 국정으로 살펴 보아서 신문의 자유가 전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다고 단정을 내릴 만한 것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로스 사무국장이 한국을 공산독재국가와 동일한 범주로 취급함에 있어서는 그 의도하는 바를 이해키 곤란한 바 있다. 

(중략)

이러한 의미에서라도 이번 기회에 우리 신문계는 오랫동안 숙제로 나려오는 신문협회를 빨리 결성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함으로써 우리 신문계도 자율적으로 신문의 윤리를 향상시킬 수 있으며 신문의 자유를 수호하고 신문인의 권익을 옹호할 수 있는 방도가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필자 서울신문학원장대리)

1959년 1월5일 동아일보 : 쩌널리즘 소고(김이석)

이쯤 되면 저널리즘이 멸시받는 언어였음이 분명해진다. 지식인들이 신문잡지에 기고하는 행위는 수치스러움이며 자신의 지적 결과물을 잡문 수준으로 낮춰 보내는 행태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당시 기자층의 지적/교양 수준을 파악해본다면 당시 지식인층들이 저널리즘을 무시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견식 있는 학자란 분들은 쩌널리즘을 멸시하는 기풍이 있는 모양이다. “그 친구는 요즘 신문 잡지에 되지도 않은 글을 디립다 쓰드구만 그럴 시간이 있다면 좀더 열심히 공부나 할 생각은 하지 않고”하고 친구를 생각이나 해주듯 비방하는 학자들을 우리들은 흔히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난 우리나라 잡지란 통 읽지 않아 간혹 어쩌다가 소설 같은 것을 들여다봐도 재미가 있어야 말이지” 자기의 제자인 문학청년이 문단 이야기를 끄집어내도 이런 투로 퉁겨버리고 만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신문이나 잡지를 전혀 글을 쓰지 않는 바도 아니다. 너무와서 졸라대기에 무엇 하나 써주었지.“ 

1960년대

1964년 2월17일 경향신문 : ‘우리나라 처음 신문석사과정’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금년부터 신문학석사학위과정이 생긴다.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이번 한국 최초로 신문학과 석사학위과정알 두어 약간 명의 신문과대학원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다. 새로 생길 중대대학원 신문과에서는 주로 신문학이론, 매스콤 이론, PR 및 라이도, TV 저널리즘 그리고 사진 및 광고에 관한 전용적인 연구를 시도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62년 4월5일자 경향신문 :‘혁명 후의 신문을 말한다-서비스’(윤상철 기자)

그는 봉사(즉 서비스)를 저널리즘의 역할로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독자의 추상적인 뜻이 곧 정의라고 한다면 신문의 봉사는 정의의 구현으로 독자의 눈을 끄는데 있다.“ 

그는 “독자로 하여금 재미나게 읽히는 것이면, 뭣이나 기사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허스트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슬쩍 비판적인 톤을 내뱉습니다. 오히려 ‘봉사’라는 한자어의 어원을 되새김질하며 하인이면서 동시에 교사라는 가치를 끌어오더군요.

독자들에게 재미만을 선사하는 것이 저널리즘이 아니라 봉사의 관점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것도 저널리즘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듯합니다. 비록 ‘신문왕’ 허스트의 코멘트에 약간 위축된 톤이긴 하지만 말이죠. 62년 박정희 정권 시절의 저널리즘은 대략 이런 수준에서 정의가 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

1964년 9월 9일 동아일보 : ‘윤리위 소집을 고집치말라’(사설)

 “저널리즘을 불가결의 제4부라고 말했던 ‘허버트 브루커’는 한편, 저널리즘이 영리사업이라는 면에서는 하이드씨이고 민주주의사회에 공헌하는 의의라는 면에서는 지킬 박사라고 말했다. 극단적ㅇ로 말하자면 저널리즘은 신적인 면과 악마적인 면을 아울러 갖추고 있는 엠비버런트적인 것이며, 어느 일면만이 강조되고 다른 일면이 무시되어서는 안되는 것은 한국의 저널리즘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1964년 11월2일 경향신문 : 기자 지망생에게(박신일)

“사회를 보고 그것을 기록하여 고발하는 엄격한 직업이란 점에서 엄청난 시련과 갈등을 감당할 태세를 언제나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한번 뛰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영하의 추운 겨울 새벽 6시에 일어나 약수동산 16번지 눈덮인 빈만가 언덕을 기어올라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는 복어알을 먹고 숨진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현실에 묵묵히 대처할 힘이 필요할 것입니다.(이하생략)“(서울대문리대 영문과졸, 경향신문 64년 입사, 외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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