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있는 시민? 저널리즘은 '대화' 그 자체다

저널리즘의 정의는 역동적이다. 고정돼있지 않으며 살아서 움직인다. 정보를 생산하고 평가하며 유통하고 전달하는 일체의 행위라는 보편적 정의에서 지금은 권력과 정부를 비판하고 감시하는 역할로서 저널리즘은 인식되고 있다. 미디어가 처한 조건, 사회적 맥락에 따라 저널리즘은 다시 정의되거나 기능의 확대를 꾀해온 것이 사실이다. 영국의 가디언이 1800년대 초 맨체스터에서 벌어진 피털루 대학살 과정에서 등장한 것처럼 저널리즘은 저마다의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 미션과 비전을 정립하고 정의의 챕터를 써왔다. 저널리즘의 전형은 시대가 처한 상황과 긴밀히 관계 맺고 있으며 동시에 이를 통해 저널리즘의 수식어들을 구성해왔다.

저널리즘에 붙은 수식어는 때론 저널리즘의 정의와 등가화되기도 했다. 정보와 의견의 교환, 전달이라는 보편적인 저널리즘의 정의는 한 사회가 당면한 복합적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수식어를 탄생시켰는데, 이로 인해 저널리즘 정의는 누군가에게 고착화된 무엇으로 이해되기에 이른다. 감시견저널리즘, 옐로우저널리즘, 공공저널리즘, 시민저널리즘은 시대가 호출한 저널리즘의 기능적 유형이지만 그것은 유일한 저널리즘의 가치이자 정의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포토저널리즘, 비디오저널리즘, 디지털 저널리즘처럼 형식과 기술이 저널리즘의 수식어로 부착되면서 다양한 변형을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 기술과 접목되고 보편화될 때까지 한정적으로 쓰이던 수식어에 불과했다.

기술적 환경 변화와 저널리즘의 정의 재설정

저널리즘의 전통적인 정의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환경에 의해 도전을 받고 있다. 미디어가 기반하고 있는 기술적 조건이 바뀌면서, 미디어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이 증폭되고 확대됐다. 또한 기술의 도움으로 오디언스의 역할도 이전과는 판이해졌다. 정보의 수신자라는 수동적 주체에 머물렀던 오디언스는 이제 사용자라는 이름으로 정보 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것이 블로그에 의해서든, 소셜미디어라는 보다 포괄적인 퍼블리싱 플랫폼에 의해서든 그들은 더 이상 저널리즘의 단순 수용자로 남아있지 않다.

뉴미디어가 저널리즘의 정의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뉴미디어부터 정의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카울(Kaul, 2016) 새로운 기술 조건을 수용한 뉴미디어는 기술, 서비스, 텍스트 형태 3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기술은 상호작용성과 디지털화, 커버전스로 서비스는 정보의 전달, 엔터테인먼트, 정치적 참여, 교육, 커머스로, 텍스트 형태는 장르의 혼합, 하이퍼텍스트성, 멀티미디어 등이다. 3가지 측면의 각각의 특성들은 때론 저널리즘의 수식어로 활용되면서 저널리즘의 지평 확대를 상징하는 용어로 재생산되곤 했다.

카울이 언급한 대로 모든 새로운 미디엄은 저널리즘의 행위와 역할(Practice)에 새로운 과제를 가져왔다. 앞서 언급한 뉴미디어의 특성들은 저널리즘의 역할 변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기표들이기도 하다. 디지털 저널리즘, 멀티미디어 저널리즘과 같이 저널리즘의 변화를 상징하는 보편적 언어는 모두 새로운 미디엄의 등장으로 조어가 된 결과들인 것이다.

위 사례를 통해 확인했다시피 분명 저널리즘은 전통적인 정의의 궤도에서 벗어났다. 엄밀하게는 확장되고 증강됐다. 예를 들어, 저널리즘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교양있는 시민을 양성하고 이들이 정치적 공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한다는 전통적 정의와 역할론은 현재의 미디어 환경에 비춰보면 빈틈이 적지 않다. 우선 정확한 정보의 생산 및 제공 주체가 변화했다. 전통 저널리즘 조직이 교양있는 시민을 만드는데 그동안 얼마나 기여해왔는지도 회의적이다. 정치적 참여를 위해 습득할 수 있는 정확한 정보의 소스로 다양화됐다. 정보의 생산자 그룹이 한정적으로 독점적일 경우에 통용되던 저널리즘 정의와 역할론은 부득불 재정의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전통 저널리즘 정의의 일방성과 계몽성

출처 | http://www.history.com/topics/enlightenment

기존의 저널리즘은 정보의 독점적 생산과 일방향성이라는 미디어 환경의 전제 위에서 내용이 조각됐다. 이로 인해 저널리즘의 미션은 일방적이었고 계몽적일 수밖에 없었다. 중요 정보의 접근권에 배타적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조건 하에서 성립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정보량이 적고 무지했던 수용자들에게 지적인 우월성을 바탕으로 교양과 교육을 제공하고 진리의 교리를 설파하던 기존의 저널리즘은 정보량의 폭증 시대엔 철지난 정의와 교만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널리즘의 정의가 증강돼야 할 필요가 대두된다.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서 저널리즘은 강의가 아니라 대화로 정의돼야 한다(Gillmor. 2003). 강의가 일방향성을 상징하는 메타포라면 대화는 인터넷으로 파생된 기술적 조건의 특성을 상징하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저널리즘은 상호작용인 것이다. 저널리즘이 대화로 정의되기까지 두 가지의 조건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수용자가 생산자의 지위를 얻게 되면서 전통 기자와 시민 간의 협업이 필수적인 과제로 떠올랐다. 특정 영역에서 기자보다 더 우월한 지적 교양을 지닌 시민들이 저널리즘에 대한 역사적 회의를 품고 생산자로 참여하게 되면서, 저널리스트들은 현명한 시민들과의 대화와 협력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밖에 없게 됐다. 시민저널리즘의 등장과 확산, 보편화가 이를 증거한다. 코바치와 로젠스틸(Kovach. & Rosenstiel. 2014 : p.15)도 “기자나 시민이 혼자서 뉴스를 생산하는 것보다 서로 협력하는 협업 저널리즘이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지 않았던가. 기술적 측면에서는 인터넷으로 시작된 미디어의 인터페이스 변화다. 기존의 신문과 방송은 인터페이스 안에서 대화를 촉진하고 수용할 수 있는 구조가 적용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인터넷은 그것이 지니는 본질적 특성에 의해서 상호작용성을 태생적으로 갖추게 됐다. 하이퍼텍스트라는 속성에서 출발해 다양한 형태의 인터액션이 기술적 조건의 변화로 인해 비교적 손쉽게 구현됐고, 수용자들은 이를 자연스럽게 학습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라디오의 진화 모델로서 AI 스피커나 챗봇 뉴스 시스템 등은 상호작용성이 새로운 기술로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화로서 저널리즘과 저널리즘의 증강

카울은 이러한 정의의 변화가 기존의 저널리즘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증강시키는 것이고 새로운 차원을 더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Kaul. 2016). 수용자들은 상업화하고 독과점화된 전통 저널리즘이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인지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들 자신의 제어권이 과거보다 훨씬 높아져야 한다는 신호를 오래 전부터 발산해왔다. 옴부즈맨이나 오피니언 면의 작은 박스로는 전통 저널리즘이 신뢰를 재구축하기엔 미흡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회의적인 수용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고 이들의 요구는 무언의 유언으로 전통 미디어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널리즘이 증강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빈말이 아니다. 마셜 맥루한은 매체 간의 관계와 역할에 관심을 가지면서 정세도와 참여도에 따라 핫미디어와 쿨미디어라는 구분법을 제시했다. 궁극적으로 그가 염려했던 바는 정세도가 높아 특정 감각에만 의존하도록 유도하는 핫미디어의 패권화였다. 책을 위시한 인쇄미디어의 시각 패권화가 그가 미디어의 이해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과제였던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정세도는 낮지만 참여도가 높은 쿨미디어의 활성화, 당시엔 텔레비전의 주류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맥루한의 참여도는 상호작용으로 대체될 수 있고 대화라는 표현으로 재구성해볼 수도 있다. 과거의 관점에서 인터넷은 정세도가 높고 참여도가 낮은 핫미디어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는 인터넷의 기능을 초기 수준에서 한정적으로 해석한 결과일 수 있다. 어쩌면 정세도와 참여도가 반비례하지 않는, 정비례하는 이상적 지점을 우리는 인터넷의 속성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과장된 해석이라는 비판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무리한 수준은 아니다.

요컨대, 저널리즘은 교양있는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정보를 강의처럼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근대적 정의에서 탈피해야 하는 시점에 서있다. 길모어의 주장대로 저널리즘은 대화이며, 카울의 제안대로 상호작용이다. 저널리즘은 수용자를 생산자의 기능을 포괄한 사용자로 바라봐야 하며, 이를 전제로 그들의 가르치기보다 대화하면서 신뢰를 재확립해야 한다. 기존의 저널리즘의 원칙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면서 한차원 높은 정의를 구성해야 한다. 신뢰를 구축하는 방법도 기존의 저널리즘 원칙만으로 부족하다. 대화적 방법을 어떻게 구사하느냐에 따라 신뢰 구축의 속도와 깊이는 달라지게 될 것이다.

무수하게 등장하는 뉴미디어는 저널리즘의 정의가 전환되는 한 복판에 서 있다. 그들에게 전통적인 저널리즘의 정의를 잣대로 들이대는 것은 정의의 교체 시기엔 가치있는 질문이 되기 어렵다. 새로운 정의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익숙한 새로운 플레이어에 의해 주조될 확률이 높아서다. 어쩌면 전제로서 저널리즘보다는 결과로서 저널리즘을 기대하는 것이 보다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참고 문헌

  • Gillmor, D. (2003). Moving toward participatory journalism. Nieman reports, 57(3), 79-79.
  • Kaul, V. (2016). New Media, Part I: Redefining journalism. Computers In Entertainment.
  • Kovach, B., &Rosenstiel, T. (2014). The elements of journalism: What newspeople should know and the public should expect. Three Rivers Press (CA). 이재경 옮김. (2014).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개정 3판). 한국언론진흥재단.

함께 읽어볼 글

허버트 갠즈의 ‘저널리즘, 민주주의에 약인가 독인가’에서 드러난 저널리즘의 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