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모호성, 수용자의 복잡다기성 그 속에서 저널리즘의 역할

저널리즘을 정의하고 진실을 규정해야 하는 책무를 더 이상 방기하기 어려운 시점에 왔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저널리스트라면 이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 탈진실의 시대, 다시 말해 진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시대에 진실을 좇는 행위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진실은 감성과 합리 사이에서 진동하는 존재다. 누군가에겐 가장 감성적인 내러티브가 진실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가장 합리적 사실의 결합이 진실일 수도 있다. 탈진실은 이유 없이 등장하지 않았다. 옥스퍼드사전 원문을 인용하면 탈진실의 시대는 “객관적 사실이 공중의 의견을 형성하는데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보다 영향력을 덜 끼치는 환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 누군가에겐 자신의 신념과 감정에 가까운 무언가가 진실이다. 그 반대로 성립한다. 그래서 진실은 감성/신념과 합리 그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이 현실을 부정하면 진실은 더욱 모호해지고 저널리즘은 희미해진다.

진실의 시대, 저널리즘의 역할은 분명했다. 진실을 틀어막는 집중화 한 권력 체계로서 왕정과 독재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것, 그것이 저널리즘의 존재 이유였다. 가디언의 탄생은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1970년대 워터게이트 사건은 ‘감시견 저널리즘’이 시대적 분기점을 만들어낸 역사적 사건이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기자들이 이 당시로부터 파생돼 행해져온 저널리즘 역할론을 유일무이한 미션으로 간주한다는 데 있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 또한 진실을 도출하기 위한 조건을 설정했지 진실의 절대성을 규정하진 않았다. ‘지배 없는 공개토론’의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자율적 공론의 비관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기획을 만들어냈다(황태연, 1995, p.71). 그것이 자율적 의사소통 행위이론이다. 물론 그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강한 신념,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합리적 이성의 조건을 축조함으로써 여전히 근대적 이성을 통한 해방적 가능성을 주목했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지금도 유효할까? 그에 대한 반박이 아니라 우리는 성찰과 비판을 통해서 다시금 저널리즘을 재정의 해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에서 힌트를 찾아낼 수 있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은 저널리즘의 미션을 4가지의 주된 역할과 5가지의 부가 기능으로 설명했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진실 확인자(Authenticator)
  • 의미 부여자(Sense Maker)
  • 목격자 역할(Bear witness)
  • 감시견(Watchdog)

추가적인 기능

  • 지적인 정보 수집(Intelligent Aggregator)
  • 포럼 지도자(Forum Leader)
  • 역량 강화자(Empowerer)
  • 역할 모델(Role Model)
  • 공동체 건설자(Community Builider)

감시견 저널리즘은 변화한 저널리즘의 정의와 역할론에서 입구에 해당하지 종착점에 해당하지 않는다. 감시견 저널리즘만이 유일무이한 저널리즘의 미션으로 남아있지 않다. 누구나가 정보를 공시하고 배포할 수 있는 시대에, 여전히 감시견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그것에 머무르는 것은 일견, 협애한 저널리즘의 이해에 따른 ‘기능 축소론’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다.

에밀리 벨 등은 뉴스의 위치 이동 이론을 설파했다(Anderson, Bell & Shirky, 2015). 뉴스의 정의와 역할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변화했다는 것이다. “관찰의 생산자에서 사실 확인과 해석이 강조되고 공중이 생산하는 글과 오디오, 사진, 동영상들의 흐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역할로 편집 단계에서 위치가 상향 조정됐다”는 것이다. 저널리즘은 한층 상향된 역할로 혹은 보다 넓은 역할로 스스로의 확장을 꾀해야 한다는 의미다.

여전히 ‘올드 기자‘들은 반발한다. 사실 수집 그 자체에 천착하며 감시견의 역할로서 스스로의 축소시킨다. 사초로서의 기사, 그것을 써내려가는 역사 기술가로서의 역할 모델에 머무르고자 한다. 그것이 저널리즘의 민주적 역할론이라고 강조한다. 그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늙은 것이다. 그들의 과도한 신념적 저널리즘 정의는 새로운 저널리즘의 창조하자는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의 제안마저도 무색케 만든다. 이들 두 학자는 어느 한쪽을 겨냥하지는 않았지만 아래와 같이 과거의 저널리즘과 저널리스트들을 비판한다. 과거 저널리즘의 정의와 역할론에 안주하려는 이들에 대한 정중한 경고다.

“대부분 기자는 역사적으로 정보 중개자로서의 역할이나 회사의 이익구조 부문에서 도전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상업적 압력으로부터 격리돼 만족스럽게 지냈다. 주관적이고 매우 비과학적인 개념이지만 그들은 소위 말하는 ‘뉴스 판단’이 자신들의 결정을 주도하는 상황에 만족해 왔다. 더구나 그러한 판단들은 상업적 압력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축복도 있었다. 그러나 주관적 뉴스 판단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는 늘 걱정해야 하는 문제였다(Kovach. & Rosenstiel, 2014, p. 31)

대중을 매개하는 게이트키퍼로서의 역할론이 지니는 취약성에 도취된 나머지 변화한 미디어 환경에서 저널리즘의 확장을 등한시한다는 지적이다. 신문과 방송의 성장기를 구가할 때 내재화한 전통적 저널리즘의 미션을 좀체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들의 뉴스 판단이 옳고, 그들에 의해 걸러진 정보가 전달될 때 저널리즘과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호흡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은 진실이 무엇인지조차 규정하기 지금의 환경과 괴리돼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시대를 규정하는 수용자의 특성

해석적 항체, 뉴스 기피, 회의적인 수용자. 지금의 수용자를 칭하는 수식어들이다(이성규, 2018b). 웬만한 사실 뉴스도 신뢰하지 않으려는 해석적 항체를 지니고, 뉴스를 기피하면서, 언론이 진실을 이야기할 것이라는 데 회의적인 태도를 지닌 수용자들이다. 이토록 복합적이고 난해한 수용자 집단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저널리스트들의 ‘뉴스 판단‘을 신뢰하지 않을 뿐더러, 정보 문지기의 역할에 대해서도 수용자들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문지기가 아니라 진실을 감추고 그들이 규정한 진실의 문으로 낚아채려는 ’진실 납치꾼‘ 면모가 관찰되면서, 언론인들에 대한 신뢰는 유례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진실 수호자로서 저널리즘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수용자들은 저마다의 진실 정의로 파편화된 채 살아가고 있다. 기술이 진실을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빌 코바치의 말대로 “기술은 사건에 관한 본질적 사실을 획득(확보)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았다”. 아니 해결해주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수용자들은 저마다의 진실을 향해 정처 없이 서핑하면서 허위정보의 그물망 안으로 숨어들어갔다. 탈진실의 시대 아니 탈신뢰의 시대, 수용자들이 마주한 절망적 현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수용자들은 복합적이고 다기하다. 변화한 수용자들을 상징하는 두 가지 용어, 복잡성, 다양성은 빼놓을 수 없는 특성이다. 무한대로 쌓여가는 정보의 양은, 수용자들이 더 다양한 주제의 정보를 취득할 수 있고, 발언할 수 있고 토론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줬다. 세세한 관심사만으로도 정보를 획득하과 커뮤니티를 구성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린 것이다. 더 이상 균질적인 집단으로서 대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앤더슨을 이를 분절적인 공중이라고 했다.

저널리스들은 이러한 변화한 수용자를 상대해야 한다. 그들은 특정 분야에서 전문적 식견을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복잡하고 다기한 그들의 특성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작업은 난해하고 지난하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적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채,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구성된 수용자’를 다시금 불러내는 건 저널리즘의 퇴화를 의미한다. 공동체의 건설자로서 수용자와의 교감, 소통을 게을리 한 이들의 ‘의사-명분’의 저널리즘이다.

틈새 미디어의 등장을 그저 상업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전통 저널리스트들의 접근법은 그래서 늙었다. 코바치-로젠스틸의 연동적 공중, 앤더슨의 복수의 공중(43)은 틈새 미디어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공중의 변화를 개념적으로 명명한 것이다. 유행으로서의 복잡다기한 수용자가 아니라 변화한 조건에서의 공중의 탄생을 의미하는 이들 개념들은 저널리스트들에게 중요한 도전과제를 제안하고 있다. 수용자와의 소통과 교감 그리고 분석이다. 이 작업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저널리스트들은 수용자들이 어떤 정보를 언제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확보한 정보를 그들이 어떻게 다뤄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파악해낼 수가 없다.

저널리즘은 수용자들의 결정을 돕는데 목적이 있다. 그들의 결정을 강제하는 데 있지 않다. 진실을 저널리즘의 목표로 상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의 결정을 돕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되도록 진실에 가까운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 저널리스트들은 그들의 결정을 강제하기 위해 복무한다. 진실 담지자로서의 과도한 사명감 혹은 진실을 꿰뚫고 있다는 오만함이 빚어낸 결과들이다.

진실은 퍼즐맞추기다. 수많은 사실들의 왜곡된 배열과 배치를 처음의 원본 상태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몇몇 진실의 조각만을 보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다. 더더군다나 “사실이지만 진실은 아니라“는 말처럼, 행위의 사실, 단편의 사실만으로 진실에 접근할 수도 없다. 유튜브 등을 떠도는 허위정보들은, 사실을 꾸며내기보다 사실의 배열을 뒤틀어버림으로써 그들만의 진실을 양산해낸다.

나가며

진실은 감성과 합리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다. 수용자는 복잡하고 다기한 성격을 드러내며 파편화하고 있다. 넘쳐나는 정보는 분절적 공중의 특성을 강화한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저널리즘은 스스로의 위치를 재조정해야 하는 압박을 받고 있다. 과거와 같은 성장의 영광은 당분간 돌아오지 않는다. 고매하고 고결했던 저널리즘에 대한 신념은 그저 선배 저널리스트들의 향수 안에서만 존재한다. 생존은 저널리스트들이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의 제약조건이 됐다.

한가롭게 균질적 대중만을 상대로, ‘상상한 가상 독자‘를 상대로 무작위의 보도를 내놓는 관행을 지켜갈 여유가 없다(이성규, 2018a). 진실에 다가가는 새로운 방법과 태도, 기법을 탐색해야 하며, 감성과 합리의 경계선을 적절히 활용하는 세련된 영리함도 개발해야 한다. 저 다양한 관심사, 다양한 지적 깊이를 지닌 수용자를 대상으로 그들의 의사결정을 도울 수 있는 적절한 커뮤니티도 제시해야 한다.

분산된 진실의 정체를 확인해야 하고, 그 진실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뿌려놓은 진실의 상대성, 사회적으로 구성된 결과로서의 진실이라는 정의와도 논쟁해야 한다. 만일 진영 혹은 특정 엘리트 집단이 누군가를 납득시키기 위해 합의한 주장과 논리가 곧 진실이라면, 저널리스트들이 진실을 좇는 과정은 앞으로 더욱 힘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의의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 진실이 구성되는 과정을 퍼즐 맞추듯 뒤쫓아갈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저널리즘적 진리 드러내기의 한 유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려워도 가야 할 길이다.

Bottom Line

We have to identify the reality of the distributed truth, and try to fit the puzzle of the truth. We should also argue with the definition of truth relativity, truth as a result of social construction, which has been sprinkled by postmodernism. If the arguments and logic agreed by the camp or a certain elite group to convince someone are just true, the process of journalists pursuing the truth could become even more difficult in the future. But even the truth defined in that way could be a type of journalistic truth revelation in itself, if journalists could jigsaw the way the truth was constructed. It’s a long way to go, even if it’s difficult.

참고 문헌

  • 이성규. (2018a). 사라진 독자를 찾아서 : 대중 소멸 시대의 저널리즘 비즈니스. 쓰리체어스.
  • 이성규. (2018b). [혁신 트렌드] 회의적인 수용자의 등장과 2018 년의 과제. 방송기자, 40, 26-27.
  • 황태연. (1995). 이론/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과 푸코 비판. 문화과학, 7(), 67-86.
  • Anderson, C. W., Bell, E., & Shirky, C. (2015). POST-INDUSTRIAL JOURNALISM: ADAPTING TO THE PRESENT. Geopolitics, History & International Relations, 7(2).
  • Kovach, B., & Rosenstiel, T. (2014). The elements of journalism: What newspeople should know and the public should expect. Three Rivers Press (CA). 이재경 옮김. (2014)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개정 3판. 한국언론진흥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