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의 사회학] 셔드슨이 말하는 저널리즘

1부 저널리즘의 현주소

04 뉴스의 시작과 발전: 미국 저널리즘의 역사

  • 저널리스트들은 스스로를 과학의 권위, 효율성, 진보주의 개혁운동에 부합하는 집단으로 위치 지으면서 동시에 갑자기 나타나 저널리즘 업계 주변에서 유사할 일들을 수행하는 홍보 전문가나 선전가들과 차별화시키고자 했다. (101)
  • 한 저널리즘 평론가는 1920년에 전쟁 경험을 모델로 만든 ‘선전국'(bureaus of propaganda)이 워싱턴에 거의 1000개가 있었다고 말했다. 저널리스트들 사이에서 이야기됐던 바에 따르면 기사의 50~60%가량이, 심지어 명망 있는 ‘뉴욕타임스’조차도 언론 홍보 담당자들의 정보 제공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101)
  • 철학자 존 듀이는 1929년에 홍보 대행사는 “현재 우리의 사회적 삶을 말해주는 가장 의미있는 상징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사 저널리즘이 탄생했던 것이다. (102)
  • 저널리스트들은 갑작스럽게 쏟아져나온 유사 저널리스트들에 둘러싸이면서 서로 간의 결속을 강화하고 집단적인 진실성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이러한 시점에서 객관성은 직업 이념이자 전문직 수호 또는 사명의 일부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객관성은 명예훼손 소송을 피하기 위한 일련의 기교적 규칙이나 편집인들이 아랫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제약 조건들이 아니라 하나의 도덕률이 된 것이다.(102)
  • 저널리스트들이 ‘객관성’을 자신의 이념으로 주장하는 순간 그것이 지니는 한계 또한 인정하게 되었다. 1930년대 당시 사람들이 해석적 저널리즘으로 불렀던 것이 유행했다. 선도적인 저널리스트나 저널리즘 교육 전문가들은 세상이 점차 복잡해지기 때문에 세상을 단순히 보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월터 리프먼, 데이비드 로렌스, 프랭크 켄트, 마크 설리반과 같은 정치 칼럼니스트들이 이 시대에 진가를 발휘했다. (102)
  • 저널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독자들이 알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러한 이해는 정당이나 당파적 정서와 무관한 것으로 당연시했다. (103)

거시적 관점

  • 미국에서 저널리즘 규범과 관행에 영향을 미쳤던 사회학적 조건들이 다른 국가에서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홍보 종사자들과 자신을 차별화시키려는 저널리스트들의 강한 욕구가 유럽에는 없었다. 홍보가 유럽보다는 미국에서 훨씬 더 광범위하고 영향력 있게 발달했기 때문이다. (103)
  • 게다가 혁신주의 시대 당시 미국 정치에서 강화된 반정당적 분위기는 유럽에서의 정당 부패를 억제하려는 노력보다 훨씬 더 컸다. (103)
  • 정당과 저널리즘의 결별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덕목은 미국에서 정치 개혁 운동이라는 거시적 흐름 속에서 손쉽게 자리 잡았는데, 유럽에서는 이에 견줄 만한 정치적 배경이나 흐름이 없었기 때문에 유럽 저널리즘에는 이러한 덕목이 나타나지 않았다. (103)
  • 유럽 저널리스트들은 미국 저널리스트들이 가졌던, 세상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타락한 노동자로서의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유럽 저널리스트들이 만약 지위를 상승시키려는 욕망이 있다면 그것은 전문직으로서의 이념이 아니라 문학적 이념이었다. (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