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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 저널리즘' 시대는 언제쯤 끝이 날까?

'기레기 저널리즘' 시대는 언제쯤 끝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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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이 실리콘밸리의 변덕에 굴복한 것은 그만큼 튼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좀 더 관대하게 설명해보자면 이렇다. 저널리즘은 국가를 지탱하는 기둥이라고 스스로 자부한다. 그것이 사실이고 기둥의 역할을 한다고 해도 저널리즘은 세운 지 오래되지 않은 기둥이기 때문에 땅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지 않다. 미국의 신문들은 지난 250년 동안 존재했지만 저널리스트들이 당파적 편향성 없이 전문가적인 태도로 기사를 쓴다는 생각이 등장한 지는 채 100년도 되지 않았다. (Foer. 2017/2019. p.182)

검색어 어뷰징에 목매고, 각종 짜깁기로 저널리즘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행위는 과연 종식될 수 있을까? 정치적 선정주의로 트래픽을 벌어들이고, 온갖 자극적인 이미지와 글쓰기로 독자를 현혹하는 지금의 풍토는 개선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때가 되면 끝이 날 ‘수도’ 있다.

종식 가능성의 힌트를 찾기 위해서는 저널리즘의 찬란했던 과거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 저널리즘의 역사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논제는 한계를 지닌다.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미국 저널리즘 생태계는 선정주의가 만개한 시점이었다. 미국 남북전쟁으로 ‘돈맛’을 봤던 허스트와 퓰리처는 전쟁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쿠바를 둘러싼 미국-스페인 전쟁도 이들에겐 먹잇감이었다. 결과적으로 미-스페인 전쟁은 발발했고, 이들은 이를 통해 한몫을 챙기기도 했다. 셔드슨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황색 저널리즘이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라는 통념은 남아있는데 이 중에서 허스트의 뉴욕저널이 그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스페인 전쟁이 끝나고,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에도 이러한 분위기는 좀체 멈추지 않았다. 전쟁을 거치면서 급부상한 선전 선동의 달인들이 유사 저널리스트로서 정보 생태계에 넘쳐 흐르는 상황을 맞이했고, 저널리스트들은 그들만의 직업적 차별성을 고민하기에 이르게 됐다(Schudson. 2011/2014, p.97-98).

황색 저널리즘이 ‘객관성’ 윤리 만들어냈다

전쟁을 불붙일 정도로 황색 저널리즘이 횡행했던 시기는 결과적으로 기자들로 하여금 ‘객관성’이라는 성찰적 윤리를 정초하도록 압박했다. 객관성은 갑자기 터져나오거나 원래부터 존재했던 저널리즘의 윤리 덕목이 아니었던 것이다. 전후 미국 워싱턴에 넘쳐나기 시작한 ‘선전국'(bureaus of propaganda)의 활동, 홍보 대행사들의 압력 등으로부터 기자들이 스스로의 직업적 위상을 지켜내거나 차별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발명품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기레기가 넘치던 시기, 기자들 스스로의 결속력을 강화하면서 ‘진짜 기자들은 이런 덕목을 지켜야만 되는 거야’라는 해결방안으로 내놓은 해법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기자 집단의 성찰적 규율 혹은 지위 상승을 목적으로 한 직업 차별적 윤리는 저널리즘의 주된 윤리강령으로 안착하면서 지금의 기자상을 탄생시키게 된다. 당대의 유사 저널리스트들(1900년대 초 버전의 기레기들)과 자신들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차원에서 고안된 윤리적 강령이었던 셈이다.

"저널리스트들은 갑작스럽게 쏟아져나온 유사 저널리스트들에 둘러싸이면서 서로 간의 결속을 강화하고 집단적인 진실성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이러한 시점에서 객관성은 직업 이념이자 전문직 수호 또는 사명의 일부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객관성은 명예훼손 소송을 피하기 위한 일련의 기교적 규칙이나 편집인들이 아랫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한 제약 조건들이 아니라 하나의 도덕률이 된 것이다."( Schudson.(2011/2014), p.102)

만약 역사가 반복된다면

image 상업적 이익을 위해 전쟁까지 부추기며 옐로 저널리즘을 확산시킨 허스트의 ‘뉴욕저널’ 출처 : https://arh346.blogspot.com/2015/09/welcome-to-yellow-journalism-end-of.html

역사가 반복된다면, 아니 하나의 순환 루프를 그리게 된다면, 지금의 ‘기레기 시대’는 손발이 잘려나갈 정도의 아픔과 상처를 겪고 나면 자연스럽게 종식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건 기자 집단이 스스로의 엘리트적 위상을 지켜내고 생존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유사 저널리스트들로 인해 저널리스트의 위상이 급전직하 하고 사회적 평판이 무너지면서 최소한의 권위조차 붕괴되는 시기, 저널리스트들은 그들만의 생존을 위한 해법 마련에 나서지 않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소수 전문 저널리스트들은 그들만의 새로운 윤리를 개발할 것이고, 이를 통해 기레기와 기레기 아닌 자의 경계선을 명확히 긋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현재까지 유력한 차별화 지점은 맥락 저널리즘, 데이터 저널리즘, 탐사 저널리즘이며, 이를 위한 행위와 강령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예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방향이 그들이 기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현재의 평판을 최소한 유지할 수 있는 길이며, 고액의 연봉을 지켜낼 명분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가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그 방향이 합리적이지 않을 이유도 없다.

나는 이 반등이 최악의 바닥을 경험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주목하려고 한다. 출입처를 통해 배타적 지위와 차별적 위상을 확보했던 기자들은 그것이 창출할 수 있는 가치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반성이 선행될 필요가 있다. 아니 그것이 자신들의 배타적 / 차별적 지위를 유지시켜주는 솔루션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곳을 뛰쳐나왔을 때, 그들이 생산하는 뉴스의 가치가 유사 저널리스트들보다 나을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또다른 기법, 윤리가 만들어져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모든 과정들을 거쳐 다시금 저널리즘과 저널리스트들의 황금시대가 오려면 제법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된다면 저널리즘은 객관, 공정 이외의 새로운 가치와 방법론으로 무장해 있을 것이고, 기자들은 과거와 같은 전도유망하며 사회적으로도 높은 평판을 보유한 직위로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 성찰의 시간이 빠를수록, 바닥의 깊이가 더 깊을수록 반등의 폭은 더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대상포진의 고통을 넘어서는 최악의 통증을 겪어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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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 2019년 10월 13일] 누군가는 한국 언론의 비극을 이야기하지만 저는 오히려 희망을 말하고 싶습니다. 앞선 이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기레기 저널리즘의 시대는 소수 저널리스트들로 하여금 새로운 보도의 윤리를 기초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소수 전문 저널리스트들은 그들만의 새로운 윤리를 개발할 것이고, 이를 통해 기레기와 기레기 아닌 자의 경계선을 명확히 긋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현재까지 유력한 차별화 지점은 맥락 저널리즘, 데이터 저널리즘, 탐사 저널리즘이며, 이를 위한 행위와 강령을 스스로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예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는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최측 또는 경찰측 추산을 인용하지 않고 서울시 생활인구 데이터 등을 활용해 저마다의 과학적인 방식으로 집회 인원을 추론합니다. 그리고 추론 과정을 상세하게 제시합니다. 투명성의 윤리에 기반한 데이터 저널리즘이 이들 소수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각사의 입장에 따라서 다른 해석의 결과물들을 내놓고는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새로운 저널리즘 윤리와 방법론이 이 혼란의 와중에도 서서히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전 그것이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검찰을 인용하는 방식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검찰 취재를 하게 된 배경과 경위를 투명하게 제시함으로써, 익명 기반의 검찰발 보도를 비판없이 인용하던 관행도 조금씩 변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알릴레오의 영향이라고 할지언정, 분명 한국 저널리즘은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흔적들이 감지됩니다. 물론 다수의 보도들은 여전히 단편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긴 합니다.

결국 이 글에서도 강조했다시피, 훌륭한 저널리스트는 그렇지 않은 저널리스트들 그리고 외부의 프로파간다 행위자들과의 직업적 차별화를 통해 그들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증명해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저널리즘의 역사에서 새로운 저널리즘 윤리가 구성돼왔던 전례처럼 우리 저널리스들도 지금 그 구성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보편 윤리로 자리잡기까지 시간이 제법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도 이 희망의 징조를 읽어내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무척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함께 이 과정을 지켜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참고 문헌

  • Foer, F. (2017). World Without Mind. Random House. 박상현/이승연 역.(2019). 생각을 빼앗긴 세계. 반비.
  • Schudson, M. (2011). The Sociology of News. W.W. Norton. 이강행 옮김.(2014). 뉴스의 사회학. 한국언론진흥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