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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기자들에게, 여성 기자들에게 객관주의 저널리즘이란

흑인 기자들에게, 여성 기자들에게 객관주의 저널리즘이란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페이지에 퓰리처상 수상자인 웨슬리 로워리의 글이 실렸습니다. 제목도 의미심장합니다. ‘흑인 저널리스트들이 주도하는, 객관성에 대한 판단’이라 해야 할까요? 로워리는 먼저 미국 저널리즘에서 객관성의 역사와 정의가 백인에 의해 주조돼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수십 년 전 미국 저널리즘이 공공연한 당파적 언론에서 객관성을 공언하는 모델로 전환한 이후, 주류는 객관적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백인 기자와 그들의 대부분 백인 상사에 의해 독점적으로 결정되도록 허용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적 진리는 백인 독자의 감성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교정돼왔다. 오피니언 페이지에서는, 수용 가능한 공적 토론의 윤곽이 주로 백인 에디터들의 시선을 통해 결정되었다. 백인들의 견해와 성향은 객관적 중립으로 받아들여진다. 흑갈색의 기자들과 편집자들이 그러한 관습에 도전하면, 그들이 밀려나거나, 질책 당하거나, 새로운 기회를 강탈 당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Since American journalism’s pivot many decades ago from an openly partisan press to a model of professed objectivity, the mainstream has allowed what it considers objective truth to be decided almost exclusively by white reporters and their mostly white bosses. And those selective truths have been calibrated to avoid offending the sensibilities of white readers. On opinion pages, the contours of acceptable public debate have largely been determined through the gaze of white editors. The views and inclinations of whiteness are accepted as the objective neutral. When black and brown reporters and editors challenge those conventions, it’s not uncommon for them to be pushed out, reprimanded or robbed of new opportunities.)

백인에 의해 규정되고 백인 독자들에 의해 승인되며, 백인 에디터들에 의해 틀지워진 개념으로서 객관성을의 한계를 짚은 것입니다. 이상적 개념으로서의 객관이 현실 안의 규범와 윤리 체계로 안착되는 과정에서 백인들에 의한 백인들을 위한 방식으로 굳어져왔다는 얘기일 겁니다. 미국 뉴스룸 구성원 대부분이 백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해석에 무리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를 위해 로워리는 자신의 경험을 알려줍니다. 보스턴 글로브가 흑인 거주 지역을 취재하면 곧장 흑인들로부터 취재 거부를 당해왔다고 합니다. 혹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는 것이죠. 흑인들의 이러한 태도에는 객관성이라는 표준의 이름으로 흑인들의 삶을 표피적으로만 접근해왔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조금더 나아가 로워리는 객관성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공정성과 진실’ 그리고 맥락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의 언급도 함께 근거로 삼습니다.

“수년 동안 나는 우리 업계가 탐욕적인 저널리즘 표준으로서 객관성의 외모를 버리고, 대신 기자들은 주어진 맥락과 가용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공정하고 최선을 다해 진실을 말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요구해 온 주류 언론인 합창단 중 한 명이었다. 이는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헌터 S 톰슨과 같은 곤조 기자들의 수 세대에 걸친 기자들부터 빌 코바치나 톰 로젠스틸과 같은 좀 더 전통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 바로 이 접근법을 주장해 왔다. 코바치와 로젠스티틸은 그들의 고전적인 텍스트인 "저널리즘의 요소"에 그것을 상세히 기술한 바 있다.

이 주장을 진전시켜 온 사람들은 공정성과 진실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서로 다르고 건강한 해석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또한 중립적인 "객관적 저널리즘"이 주관적 의사결정의 피라미드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것도 안다: 어떤 이야기를 다루고, 그 이야기들을 얼마나 치밀하게 커버해야 하는지, 어떤 소스를 찾고 포함시켜야 하는지, 어떤 정보가 강조되고 어떤 것이 경시되는지. 어떤 저널리즘 과정도 객관적이지 않다. 그리고 어떤 개인 기자도 객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For years, I’ve been among a chorus of mainstream journalists who have called for our industry to abandon the appearance of objectivity as the aspirational journalistic standard, and for reporters instead to focus on being fair and telling the truth, as best as one can, based on the given context and available facts. It’s not a novel argument — scores of journalists across generations, from gonzo reporters like Hunter S. Thompson to more traditional voices like Bill Kovach and Tom Rosenstiel — have advocated this very approach. Mr. Kovach and Mr. Rosenstiel lay it out in detail in their classic text “The Elements of Journalism.”

Those of us advancing this argument know that a fairness-and-truth focus will have different, healthy interpretations. We also know that neutral “objective journalism” is constructed atop a pyramid of subjective decision-making: which stories to cover, how intensely to cover those stories, which sources to seek out and include, which pieces of information are highlighted and which are downplayed. No journalistic process is objective. And no individual journalist is objective, because no human being is.”

주관적 의사결정 위에 ‘객관주의 저널리즘’ 구축

여기서 제가 주목했던 부분은 주관적 의사결정의 피라미드 위에 ‘객관주의 저널리즘’이 구축돼 있다고 한 대목입니다. 앞서서도 언급했다시피, 목표로서 과정으로서, 방법론으로서 저널리즘의 객관성은 백인 의사결정자들의 누적된 선택과 결정 위에서 만들어졌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사건을 취재할 것인지, 어떤 취재원을 인용할 것인지, 어떤 정보를 더 강조할 것인지 이 모든 과정이 백인들에 의해, 백인 독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선택돼 왔기에, 그 위에 개념화한 객관주의는 그래서 객관적일 수 없다는 의미일 겁니다. 나아가 근본적으로 인간은 객관적일 수 없고, 개인 기자들 또한 객관적일 수 없기에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흑인을 여성으로 치환하면 실은 비슷한 관점을 얻게 될 겁니다. 미국 백인 중심의 객관주의 저널리즘 관행을 모사해온 한국의 저널리즘 역사는 여기에 ‘엘리트 남성’들의 주관적 선택과 결정 위에서 새로운 기준을 더해왔습니다. 미국 객관 저널리즘 관행을 더 치밀하게 복제하려 했어도 이러한 로워리의 지적 앞에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겁니다.

디지털뉴스리포트 2020 중 일부

한국은 이미 표방된 객관 저널리즘의 붕괴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디지털뉴스리포트 2020’을 보면, 독자들은 자신의 관점과 같은 뉴스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무척이나 뚜렷해졌습니다. 관점이 없는 객관적인 뉴스에 대한 선호가 52%대로 여전히 높은 편이긴 하지만 타국과의 수치와 비교해보면, 같은 관점의 뉴스를 선호하는 비중이 상위권에 속하는 편입니다. 이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간의 객관이 공정성과 진실의 초점을 얼마나 흐트러 놓았는가에 저는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표로서의 ‘저널리즘 객관성’은 이미 불공정과 유사한 의미로 희석되거나 산화됐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수용자들은 그들이 표방하는 객관, 중립을 소비해왔지만,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결단코 객관이지 않았구나를 역사적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객관을 이야기해봐야 믿지 않는 현상이 뚜렷해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객관이라는 이름으로 사고와 가치관을 주입해왔던 기존 언론의 관행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요?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경로로서 객관은 여전히 매력적인 개념일 겁니다. 개념상으로는 말이죠. 하지만 그 이름을 한국에서 다시 꺼내올리는 것은 ‘정파성, 불공정성의 치장품’으로 인식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태동할 때, 핵심 요소로 스며들어 있던 직업적 전문성과 윤리적 차별성, 상업적 가치 등은 이미 가치가 소진돼 버렸다는 것이죠.

더이상의 논의는 저의 다른 글을 읽어보시길 권해드리고요.

뉴욕타임스 오피니언의 이 에세이를 통해서 저널리즘의 객관주의가 흑인들의 차별에 어떤 방향의 기여를 해왔는지, 나아가 한국에서 저널리즘 객관주의가 여성 혹은 지역 시민들에게 어떤 방향으로 인식돼 왔는지 성찰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적어봅니다. 저 또한 성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추가 : 이어지는 논쟁들